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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대만은 선거를 통해 자유민임을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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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대만은 선거를 통해 자유민임을 재확인했다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4.01.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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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조남현 시사평론가

자유는 존엄과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절대적 요건
홍콩을 짓밟지 않았으면 대만 국민들이 반중했을까
라이칭더 대만 총통 당선인 ⓒ연합뉴스
라이칭더 대만 총통 당선인 ⓒ연합뉴스

시진핑의 중국이 대만 침략 위협을 들먹이며 민진당의 라이칭더 후보의 당선을 노골적으로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인들은 라이 후보를 선택했다. 그 결과 민진당이 3연속 집권함으로써 국민당과 민진당이 두 번씩 교대로 집권해온 관행(?)이 깨졌다. 이는 전체주의 중국의 선거 개입이 역효과를 낳았음을 보여준다.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국제정치학적인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대만인들이 ‘자유’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대만인들이 자유를 선택한 건 중국이 홍콩을 접수하며 강조했던 ‘일국양제’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고 난 학습효과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중국이 홍콩인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며 말 그대로의 일국양제를 보장했다면 대만인들의 우려도 키우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진핑의 전체주의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빤히 보이는 터라 대만인들의 ‘탈 중국’ 선택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자유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절대적인 요건이다. 자유는 개인의 자유일 수밖에 없으며, 개인의 자유는 개별자로서의 존재 의미를 가질 때만 비로소 지켜질 수 있다.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 중국의 영향 아래로 들어가면 이와 같은 자유는 보장될 수 없으며, 인간의 존엄성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대만인들의 선택에 주목해야 할 이유도 이것이며, 자유인으로서의 세계 시민의 연대가 필요한 이유도 이것이다.

조남현 시사평론가
조남현 시사평론가

그런데 왜 전체주의는 사라지지 않을까? 히틀러의 제3 제국, 스탈린의 소련, 마오쩌둥의 공산 중국, 폴 포트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를 겪은 인류가 21세기 고도의 문명 시대에도 전체주의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미스터리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모순성 탓일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일까.

짐작기로는 지식의 허상과 지식인들의 위선이 가장 중요한 배경이 아닐까 한다. 플라톤에서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져 온 전체주의의 계보가 여전히 지식인 사회에서 받들어지고 있는 데서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한다. 플라톤이 아무리 인류 지성사, 특히 서양 문명의 원조 자리에 있는 인물이라 하여도 그의 그릇된 가치관은 엄격히 비판되어야 마땅한데도 지식인 사회, 특히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러기는커녕 신비주의적 사고의 대상으로 치켜세우는 게 사실상 일반화되어 있다.

플라톤은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지배자는 지배하고, 노동자는 노동하고, 노예가 노예일 수 있다면, 국가는 정의로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플라톤은 “현명한 자는 이끌고 통치해야 하며, 무지한 자는 그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플라톤의 이러한 사고에 대해 “순전히 전체주의적이고 반인도주의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포퍼의 이러한 비판은 우리 사회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 않다.

플라톤의 ‘이상(이데아론)’은 헤겔의 역사주의로 이어진다. 역사주의란 역사가 어떤 법칙에 의해 발전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역사발전에 어떤 법칙이 있을 수 있을까. 그보다 먼저 역사가 발전한다는 명제는 참일 수 있을까. 역사발전의 법칙을 논하기 위해 일단 역사가 발전한다고 전제하고 생각해 보자. 물리학에서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어떤 법칙을 발견해낼 수 있으되 그건 언제든 반증될 수 있으며, 따라서 발전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물리학과는 다르다. 거기에 법칙이 있다면 그건 불변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법칙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역사에는 어떤 법칙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란 지난 일이고, 어떤 법칙이 있더라도 지나간 일을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포퍼는 헤겔이 역사의 법칙을 논한 데 대해 “논리학의 거장으로서의 그가 자신의 강력한 변증법적 방법으로 형이상학적인 비단 모자로부터 실제로 살아있는 토끼를 끄집어내는 요술을 부리는 것은 헤겔에게는 어린애의 장난에 불과했다”고 비아냥댔다. 과학철학자 포퍼로서는 도무지 헤겔을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현대전체주의의 근원인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발전론의 세례를 받았다. 다만, 헤겔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설정한 ‘정신’을 마르크스는 ‘물질’로 대체한 것이 다르다. 이른바 사적 유물론이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물질로 인하여 사회가 변동하며 궁극적으로 공산사회가 도래한다는 이론을 제시했고, 그를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 이론을 종교의 교리처럼 받들었다. 그리하여 목적이어야 할 인간이 수단으로 전락하며 크나큰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현대 세계사의 가장 큰 줄거리이다.

문제는 이제는 그러한 오도된 가치에서 벗어날 법도 한데 전혀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아직도 중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로 남아 있으며, 왜 그 비정상이 정상을 위협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개선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것인가. 오히려 중국인들은 퇴행적이며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의 포로가 되어 전체주의 중국의 굳건한 토대가 되어주고 있다.

퇴행적인 모습은 비단 중국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으로 상대국 국민은 물론 자국민의 희생이 엄청난데도 러시아인들은 왜 현대판 스탈린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지를 생각하면 인간 이성의 ‘하찮음’에 비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이나 러시아인들과 얼마나 다를까. 우리는 자유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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