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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일제치하 VOA로 들려오는 이승만이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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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일제치하 VOA로 들려오는 이승만이 희망이었다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4.03.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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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조남현 시사평론가

영화 ‘건국전쟁’이 못다 한 이야기③
전설의 탄생, 떨림과 울림의 목소리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포스터가 극장가에 걸려있다. ⓒ연합뉴스
서울 시내 한 영화관의 상영시간표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띄워져 있다. ⓒ연합뉴스

한국 사회에서 이승만이라는 이름은 늘 ‘박사’라는 호칭과 함께 불렸다. 심지어 대통령 시절이나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이승만 대통령’보다 ‘이승만 박사’가 자연스러운 호칭이었다. 영화 ‘건국전쟁’에서도 소개되고 있지만 그건 이승만이 6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학사과정을 거쳐 하버드대학교 석사학위와 프린스턴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은 데서 비롯된 일이다. 이것은 최소 12년이 걸리는 일인데, 고등학교 정규 학력도 없는 이승만이 그 짧은 기간에 해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역사학에서 정치학, 철학사, 외교학, 경제학까지 두루 섭렵했다는 점이다. 

사실 미국 명문대학교 학사에서부터 박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초단기간에 성취한 것은 한국인들은 물론 미국인들에게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일본인들과 중국인들도 수많은 사람이 미국 유학길에 올랐지만, 그들 가운데 이승만에 필적할 만한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은 없다. 이승만은 동양인 최초로 미국 명문대에서 국제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주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인들에게도 이승만은 경외의 대상이었고, 그 명성은 국내까지도 알려졌다. 이승만이라는 이름 뒤에는 으레 ‘박사’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그래서다.

이승만이 더욱 주목받은 것은 우드로 윌슨(Woodrw Wilson)과의 관계 때문이다. 윌슨은 이승만의 스승이자 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프린스턴대학교 총장이었으며, 이후 미국 대통령이 된 인물로 우리에게는 ‘민족자결주의’로 유명한 인물이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이승만을 외국 유학을 한 다른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시민권자가 되어 얼마든지 출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그는 환국 때까지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가 타국 시민권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도산 안창호가 미국 시민권자였던 것과 대조된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이승만은 한일병합조약 선포 나흘 뒤인 1910년 9월 3일 뉴욕항에서 영국의 리버풀로 가는 여객선 발틱호에 몸을 실었다. 1주일간의 항해 끝에 리버풀에 도착한 이승만은 런던과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 유럽의 주요 도시를 둘러보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오른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여 만주를 거쳐 압록강 철교를 건넌다. 열차는 10월 10일 저녁 8시쯤 서울역에 도착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하자 미국의 중재를 끌어내기 위한 밀사의 임무를 띠고 미국 길에 오른 지 6년 11개월여 만에 고국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조남현 시사평론가
조남현 시사평론가

이승만은 자신이 이룬 성취, 곧 국제법과 정치외교학 등을 고국을 위해 쓸 수 없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조국이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그가 귀국을 택한 것은 한국 YMCA를 통해 기독교를 전파하는 동시에 청년들에게 은밀히 독립 정신을 고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물론 YMCA에서 활동하는 우국지사들은 일제의 집중 감시 대상이었다. 당시 YMCA는 개화한 지식인들의 집합소였다. 독립협회 이래 지도자급 지식인들, 곧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등 독립을 꿈꾸던 인물들이 당시 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서울 YMCA 학감(총무)으로 부설 고등학교에서 성경과 국제법을 가르쳤는데, 이때 그의 명강의를 들은 제자 중에는 훗날 이름을 떨친 사람이 많았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초대 외무장관 임병직, 공화당 의장 정구영, 과도정부 수반 허정, 대통령 윤보선, 대한상공회의소 소장 이원순 등이다. 이들은 이승만을 존경했고, 국내에서 이승만 지지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이승만은 미국인 총무 브로크만(Frank M. Brockman)과 함께 전국 순회 전도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건 전국 기독교 학교를 방문하여 YMCA를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37일간 13개 선교부를 방문하여 33차례 집회의 강연을 하며 7,500여 명의 학생을 만났다. 학생들에게 이승만은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영향은 학생들의 가족과 친지는 물론 지역사회 전체에 미쳤다. 미국 명문대 박사이자 윌슨의 제자이며 지식인들조차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상의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다녀갔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한국의 대중에게 이승만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새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젊은 지식인들이 YMCA를 중심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제가 모를 리 없었고, 좌시할 리도 없었다. 일제 경찰은 1911년 11월 11일 평안북도 선천(宣川) 신성학교 교사 7명과 학생 20명을 총독 암살 미수 혐의로 검거해 서울로 압송했다. 당시 테라우치 초대 총독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고 서북지방을 시찰할 때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날조한 것이다. 검거 열풍이 불었다. 목표는 서울의 지식인들이었고, 무려 600여 명이 검거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를 대변하던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에서는 이 사건으로 체포된 이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들어 암살 미수 사건이 미국인 선교사들의 선동에 따른 것으로 몰아갔다. 이것이 미국과 일본의 외교적 갈등으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자 일제는 정치적 해결로 매듭지으려 했다. 결국 체포된 600여 명 가운데 상당수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고 123명이 기소되었다. 재판은 1912년 6월 28일부터 이듬해 10월 9일까지 진행되었는데,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제1차 재판에서 재판부는 18명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나머지 105명에 대해서는 징역 5~1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105인 사건이다.

이승만도 당연히 주요 체포 대상이었다.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의 빌미가 된 제2회 전국학생 하령회(夏令會)를 개최할 때 윤치호를 대회장으로 옹립하고 실무를 맡아 처리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승만은 무사했다. 선교사들이 ‘이승만은 미국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어서 그를 체포하면 미국과의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해 체포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무사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명성 덕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 조국에 머물며 활동을 계속하는 건 일제가 아무리 미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무단통치를 하던 조선총독부 경찰에 언제 끌려갈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1912년 미국 미네소타주의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기독교 감리회 제4회 총회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한다는 명분으로 이승만이 출국할 수 있게 도왔다. 

그렇게 이승만은 다시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1912년 3월 26일 그의 나이 만 37세가 되던 날 이승만은 서울을 떠났다. 도중에 도쿄에 들러 한국 YMCA에 참여하고 있던 조만식(曺晩植), 송진우(宋鎭禹), 이광수(李光洙), 안재홍(安在鴻), 신익희(申翼熙), 최린(崔麟), 김병로(金炳魯), 이인(李仁), 현상윤(玄相允), 윤백남(尹白南), 김필례(金弼禮) 등 훗날 각계 지도자가 된 유학생들을 만났다. 이들은 한국인의 전설이 된 이승만을 열렬히 환영했고,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들 가운데 대다수가 일제 치하 이승만의 국내 기반이 되었다. 

'건국전쟁'에 담긴 이승만 전 대통령의 1954년 미국 뉴욕 카퍼레이드 장면. 다큐스토리 제공 ⓒ연합뉴스
'건국전쟁'에 담긴 이승만 전 대통령의 1954년 미국 뉴욕 카퍼레이드 장면. 다큐스토리 제공 ⓒ연합뉴스

이승만이 전설이 된 결정적인 사건은 해방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린 이승만의 목소리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탄 것이었다. 1942년 6월 13일부터 몇 주에 걸쳐 우리 말과 영어로 매일 방송된 이승만의 연설은 그 특유의 떨림의 목소리로 인하여 듣는 이들에게 울림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연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300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

이승만은 이 연설에서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결국 일본에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며 일본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김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등이 합심하여 중경에서 우리 임시정부를 가동하고 있음과 동시에 이청천 등이 지휘하는 광복군이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래서 국내외에 있는 국민도 일본군의 군기창을 파괴하고 철로와 도로를 끊으며 ‘왜적’에 항거할 것을 촉구했다. 

이승만의 연설을 국내에서 들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이승만이라는 이름은 신화의 옷을 입게 된다. 구한말의 명 연사, 미국 명문대 박사로서 국내 전도 여행을 다니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영감을 준 인물,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대통령, 그리고 어둠 속에서 보이는 한 줄기 빛과 같은 ‘미국의 소리’ 속의 이승만은 그렇게 하여 전설이 된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이 구름 군중을 몰고 다닐 수 있었던 것과 미국 국무부 및 군정 당국과의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집요하게 미소공위를 파탄시키려 한 것, 아무도 입에 올리기 어려운 단독정부 수립을 주창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사회에서 마술적 위력을 지녔다고 평가받을 정도의 대중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영화 ‘건국전쟁’은 이승만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지만 거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전설 이승만의 진면목을 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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