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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김구에게 100명이 모였다면 이승만은 1만명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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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김구에게 100명이 모였다면 이승만은 1만명이 모였다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4.02.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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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조남현 시사평론가

영화 '건국전쟁'이 못다 한 이야기① - 이승만이라는 마술적 이름
미-소공동위 깨기 위해 1949년 전국 순회 가는 곳마다 운집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개봉 27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는 이승만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아쉽게도 제한된 시간으로 인하여 이승만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고 있다. ‘건국전쟁’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영화가 못다 한 이야기를 3회 정도 연재하려고 한다. 
'건국전쟁'에 담긴 이승만 전 대통령의 1954년 미국 뉴욕 카퍼레이드 장면. 다큐스토리 제공 ⓒ연합뉴스
'건국전쟁'에 담긴 이승만 전 대통령의 1954년 미국 뉴욕 카퍼레이드 장면. 다큐스토리 제공 ⓒ연합뉴스

‘건국전쟁’에서 관객들은 지금까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른바 ‘런승만(run-승만)’이라는 비아냥을 낳은 한강 다리 폭파 관련 사실도 그중 하나. 서울 시민을 안심시켜놓고 자신만 살겠다고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도망쳤다는 게 그간 널리 유포된 오해였다. 보수진영의 유력 정치인 유승민 전 의원조차 ‘런승만’을 운위할 정도였으니 그간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오해가 얼마나 컸는지는 짐작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부교를 설치해 민간인이 건너게 하는 사진을 발굴하여 공개함으로써 바로 잡았다.

미국 뉴욕에서의 카퍼레이드 영상은 관객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승만이 어떤 인물이길래 자유민주주의의 본거지인 미국의 정부와 뉴욕 시민들이 이렇듯 영웅으로 받들었을까. 세계 최강대국 미국으로부터 이와 같은 예우를 받은 국가 지도자가 한 사람이나 있을까. 단언컨대 한국에서는 물론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이승만 대통령과 같이 미국으로부터 이렇듯 각별한 예우를 받은 국가 지도자는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없다. 그런 영상을 발굴하여 대중에 공개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 것은 ‘건국전쟁’의 가장 큰 공로라 할 것이다.

뉴욕의 100만 시민이 ‘자유의 수호자’로 이승만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하는 장면을 보며 관객은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실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국민, 심지어 ‘건국전쟁’을 보고 감동한 사람들조차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이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연구자나 학자들조차 일부를 제외하고는 진실을 모른다. 대부분 이승만의 위상을 막연하게 김구와 비슷한 정도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승만보다 김구가 더 높은 위상을 갖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마저 있다. 하지만 김구를 이승만에 견주어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해방정국에서 대중에게 이승만은 한 마디로 ‘전설’이었다. 그의 명성과 위상에 근접한 독립운동가나 정치인은 없었다.

조남현 시사평론가
조남현 시사평론가

1946년 4월 29일 부산의 공설운동장과 그 주변, 그리고 운동장에 이르는 길이 하얗게 덮였다. ‘이승만 박사’가 온다는 소식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부산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것. 운집한 군중의 수는 무려 20만여 명. 사람들은 먼발치에서라도 이승만 박사의 모습을 직접 보고, 이 박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 했다. 당시 인구에 비추어볼 때 놀라운 수의 군중이다.

이승만이 부산을 방문한 건 그의 전국 순회의 한 과정이었다. 이승만은 4월 15일부터 전국 순회에 나섰다. 그가 각 지역을 방문키로 결심한 것은 서울에서 미군정을 상대로 그의 뜻을 관철하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미군정과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미국은 연합국의 일원인 소련과 합의하여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었는데, 이승만은 거기에 완강히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하든 미소공동위원회를 깨뜨리기 위해 자신의 반공반소(反共反蘇) 입장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미국은 이승만으로 인하여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래서 미국은 이승만을 배제함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를 원만하게 풀어나가려 했다. 1946년 4월 16일 미국 국무장관 번즈(James F. Byrnes)가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Langdon)에게 보낸 지시문의 한 부분은 그런 미국의 입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임시정부(여기서 임시정부란 미소 간 협의에 의해 장차 만들어질 임시정부를 뜻한다: 필자)의 인물 선정 문제에 있어서 공위는 소속 정파에 상관없이 비협조적인 극단의 인물을 피하는 것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을 줄 안다.”

같은해 6월 6일 미국 국무성이 두 번째로 시달한 지침서도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들(해외서 귀국한 독립운동가들, 특히 이승만: 필자)의 한국 정치에의 등장은 소련과 어떤 타협에 이르게 되는 데 있어 어려움을 매우 증대시킨다. 이런 이유로 전체적으로 볼 때 이들의 한국 정치에의 참여는 한국에서의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되고 있다.”

어떻게든 소련이 남한 지역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다하고 있던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미군정이라는 ‘한심한 친구들’을 상대로 ‘소련과의 협상은 결국 소련에 말려드는 일’이라는 점을 이해시키는 것보다는 여론의 지지를 모으는 게 중요했다. 당시 지방 민심은 해방 직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지방조직인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의 영향으로 좌익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인공’의 중심인물은 여운형이지만 그는 간판에 지나지 않았고, ‘인공’을 설계한 장본인은 공산당의 박헌영이었다. 당시 대중은 공산주의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의 선전 선동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의 지방 순회는 여론의 대세를 바꾸어 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전국 순회는 일거에 여론의 판세를 바꾸어 놓았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의 연설회에 적게는 1만여 명에서, 많게는 10만, 최대 20만의 군중이 운집했다. 1946년 4월 16일 천안 3만여명, 4월 18일 대전 4만여명, 4월 22일 김천 4만여명, 4월 24일 대구 10만여명, 4월 25일 경주 5만여명, 그리고 4월 29일 부산 20만여명이다. 이어 5월 1일 마산 4만여명, 5월 4일 진주 3만여명, 5월 5일 순천 3만여명, 5월 8일 목포 3만여명, 5월 9일 광주 5만여명 등이 이승만 연설회장에 모였다. 군중의 운집은 비단 연설회장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이 자동차를 타고 지나는 도로 연변에도 수많은 사람이 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만큼 이승만의 명성은 높았다. 당시 그처럼 구름 군중을 몰고 다니는 정치인은 이승만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김구도 지방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많이 잡아야 100명 안팎의 인원이 모이는 수준이었다. 

사진은 지난 12일 서울 시내 영화관 매표기. ⓒ연합뉴스
사진은 지난 12일 서울 시내 영화관 매표기. ⓒ연합뉴스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 진보를 자처하거나 대중 추수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곧잘 이승만의 ‘전국 순회’를 이승만의 정치적 위상과 대중의 지지를 높이기 위한 전략으로 설명하곤 한다. 말하자면 해방정국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약삭빠른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고 폄훼하는 것이다. 특히 TV 등 대중매체에서 그와 같이 말하면 한국현대사에 무지한(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으므로 무지할 수밖에 없지만) 출연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 알았다. 이승만이 대중의 지지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자신의 높은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좌익 우세의 여론을 돌려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대중적 지지와 카리스마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력적이었는지는 유엔(UN) 한국 임시위원회 의장 메논(Menon)이 1948년 2월 19일 열린 유엔 소총회에 보고한 내용에 잘 드러나 있다. 메논은 한국의 정치 상황과 이승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유엔에 의해 한국의 국민정부로서 승인될 경우 남한에서 즉시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정당은 두 개다. 그것은 이승만 박사가 영도하는 독촉국민회의와 김성수 씨가 영도하는 한국민주당이다. 이점에 관하여 그들이 남한 인민 대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가의 여부를 확실하게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그들이 남한에서 조직된 여론의 주요 부분을 대표한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정당은 하나의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 재산이라는 것은 곧 이승만 박사의 성가이다. 이승만 박사의 이름은 남한에서 마술적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 그의 연륜과 학식과 사교적 매력과 윌슨 대통령과의 친분과 한국의 자유에 대한 생애를 통한 일관된 옹호로 말미암아 네루가 인도의 국민적 지도자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한국의 국민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외국인 외교관이 보기에도 이승만이라는 이름은 마술적 위력을 지녔던 것이다. 유엔 한국 임시위원회는 당연히 당시 한국 사정에 정통했다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메논의 평가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그런데 메논이 이승만을 네루에 견주어 말한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아마 그가 인도 사람이어서 이승만을 네루에 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학식과 지성, 국제정치와 인간사회에 대한 이해, 철학적 사유의 깊이와 통찰력 등에 있어서 네루는 이승만에 미치지 못한다. 이는 물론 필자의 주관적인 평가이지만, 네루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하려 했을 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있기보다는 제3세계에 머무르려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도의 경제발전이 저해되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그의 인식의 지평을 이승만의 그것과 같은 선에 놓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암튼 이승만은 그런 존재였다. 마술적 이름으로 구름 군중을 몰고 다니는 신화적 인물. 그렇기에 그가 해방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고, 기어이 대한민국 탄생을 견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미소간 협상을 깨뜨리려는 이승만의 집요한 노력이 없었다면 미국은 소련과 ‘협상이라는 것’을 하며 한반도를 동유럽의 상황으로 밀어넣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승만을 굳이 ‘건국 대통령’이라고 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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