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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남현의 종횡무진]당신이 자유인이라면 이번 투표는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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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남현의 종횡무진]당신이 자유인이라면 이번 투표는 자명하다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4.04.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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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조남현 시사평론가

정치란 자유인인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장
범죄자임이 분명한 자들이 대중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더 득세하는 지경
22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지난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시선관위 앞 '투표함 보관장소 CCTV 영상 열람장소' 모니터에서 보관장소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연합뉴스
22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지난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시선관위 앞 '투표함 보관장소 CCTV 영상 열람장소' 모니터에서 보관장소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연합뉴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이번 총선 사전 투표율이 31.28%로 잠정 집계돼 역대 총선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보도다. 그만큼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의미다. 유권자들은 이번 총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정권 심판론이나 정부 지원론 중 하나에 무게를 두고 있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번 총선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치의 퇴행을 막을 수 있을지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는 언제부터인지 정치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어 안타깝다. 정치란 무엇인가 다시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정치는 유권자가 스스로 자유인임을 증명하는 행사다. 영어 폴리틱스(politics)를 한자어로 번역한 ‘정치’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폴리스(polis)에서 유래한 말이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정치는 폴리스의 구성원, 곧 시민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폴리스의 시민은 자유인이다. 아테네에서 모든 사람이 다 민주주의의 의사결정에 참여한 걸로 생각하기 쉬운데 노예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자유인의 몫이었고, 그건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오늘의 정치가 자유인으로서 권리와 의무의 행사와는 상당히 멀어져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그런 특징이 두드러진다. 

자유인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자유인이다. 노예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따라서 책임질 일도 없다.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래서 고민할 이유도 없다. 다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다. 그런 노예에게 정치란 필요치도 않거니와 있을 수도 없다. 형식적으로 노예가 아니더라도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했을 때 그는 노예와 다를 바 없다. 이를테면 왕정 하에서의 백성은 물론이고 그 신분이 높다고 하더라도 왕의 신하라면 본질에 있어서 자유인이라고 할 구 없다. 왕정이나 전체주의 체제에서 1인 외에는 아무도 자유인이라고 할 수 없다. 자유인이 아니면 정치를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세 번째 정치의 본질에서 더욱 분명히 밝혀진다.

조남현 시사평론가
조남현 시사평론가

둘째, 정치란 이해의 조정이다. 인류가 집단을 형성하며 사회를 이루고 최초로 등장한 국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다. 인류 최초 드라마인 길가메시 서사시를 낳은 이 수메르는 왕정 체제였으며, 당연히 신분제 사회였다. 거기에서 정치란 있을 수 없었다. 그건 고대와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정치란 공동체, 곧 사회의 동등한 입장에서 자기의 이해와 상대의 이해, 또는 개인과 집단의 이해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A는 마을에서 큰길을 만드는 게 자기의 이익에 부합하고, B는 냇가에 다리를 만드는 게 유리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다른 공동 사업을 벌이는 것을 원할 때 이를 서로 모여 의논하여 조정하는 게 바로 정치다. 따라서 노예는 정치에 참여할 수도 없거니와 참여할 이유도 없다. 노예에게 이해관계란 없으며, 단지 주인의 선한 의도에 기대는 것 외에 바랄 게 없기 때문이다. 왕정 체제의 백성도 설혹 노예의 신분이 아니라 하더라도 스스로 공동체의 의사결정을 하는 주체가 아니므로 자유인이 아니었으며, 그런 사회에서 정치란 있을 수 없었다. 

셋째,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앞에서 이해의 조정이란 결국 타협을 뜻하는데 그건 정치는 곧 협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협상은 말로 하는 것이며, 서로 상대를 이해시키고 동의를 끌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말의 중요성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정치를 보면 온갖 혐오의 언어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건 정치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정치는 증오와 적대감만 보인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장을 방불케 한다. 이건 단순히 정치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정치가 실종되고 있다는 것, 아니 이미 실종되었다는 게 문제다.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나도 상처를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저지르고 보는 게 지금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정치인 또는 정치세력만 그러는 게 아니라 그 정치세력의 지지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넷째, 정치는 가치의 추구다. 자유인인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장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유권자 중 상당수는 영호남 등 지역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지역감정이 대를 이어 계승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의 정치는 가치의 실현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치 추구는 이념의 문제다. 그런데 지역감정에 매몰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노라면 비록 편향적이라 하더라도 차라리 이념 지향적이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진보니, 보수니 하며 자기 정치 성향을 말하는 유권자 대부분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무엇이 진보인지 개념 자체가 무너진 지 오래이기도 하다. 

현실 사회주의, 곧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할 진보 이념은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좌파 진영에서 한가락 했다는 인물들이 따로 또는 같이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숙성되어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그건 그들의 사유나 창의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진보라는 환상으로 인하여 세상을 바로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인간 이성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 좌파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가 극히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퇴행적 정치가 일상화되고 있다. 심지어 범죄자임이 분명한 자들이 오히려 대중적으로. 곧 정치적으로 더 득세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나라 정치가 앞으로 얼마나 더 황폐해질지 가늠키조차 어렵다. 

부재자 투표가 끝났지만 아직 본 투표가 남아 있다. 이번 총선이 갖는 의미를 올바로 인식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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