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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건국전쟁이 밝혀낸 '김구 신화'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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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건국전쟁이 밝혀낸 '김구 신화'의 진실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4.04.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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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조남현 시사평론가

남북협상은 소련의 기획이고 김구가 거기에 놀아났을 뿐
북 김일성의 남침 알고도 "내가 건국 참여할 이유 있나?"
더불어민주당 총선 영입인재 백범 김구 증손자 김용남씨.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영입인재 백범 김구 증손자 김용만 후보.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총선 영입 인재로 경기 하남을에 전략공천을 받은 김용만 후보는 백범 김구의 증손자다. 그가 전략공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증조부 김구의 후광 덕분이었을 것이다. 민주당이 그를 영입한 것은 오랜 세월 한국 사회에서 확대 재생산되어 온 ‘김구 신화’의 힘을 믿기 때문이리라. 김 후보가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 대해 “백범 김구의 정신을 잘 계승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증손자라는 사실 자체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백범의 뜻을 이어받아 '삶으로 애국하자'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백범의 올바른 정치로 하남의 새로운 성장을 이뤄내겠다”라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라고 볼 수 있다. 백범의 뜻이나 백범의 정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김 후보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참 궁금하다. 이유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 김구는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통일에 모두 바치신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백범기념관 김구의 좌상 설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김구 신화는 거짓이 진실로 둔갑한 결과다. 

조남현 시사평론가
조남현 시사평론가

개봉하자마자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다큐멘터리영화의 신기원을 이룬 영화 ‘건국전쟁’을 본 관객들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그간 알려져 온 게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동시에 백범 김구의 ‘반역’ 사실을 처음 접하며 깜짝 놀랐을 것이다. 반역이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민족의 영웅 김구를 두고 반역이라니 이런 ‘반역’이 있을까 생각하겠지만 거기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실제 김구는 역사에 큰 죄를 지었다, 다만 위선적인 한국 사회가 그걸 애써 외면해 왔을 뿐이다.

그는 이른바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 갔다 온 2개월쯤 뒤인 1948년 7월 11일 경교장으로 그를 찾아간 중국 총영사 유어만(劉馭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북한군:필자)을 남진(南進)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유어만은 김구에게 왜 이승만 박사와 협력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내 무너지고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수중에 떨어질 것인데 내가 참여할 까닭이 있느냐?’는 말을 한 셈이다. 그래서 ‘반역’이라고 한 것이다. 대한민국에만 반역한 게 아니라 그가 그토록 강조한 ‘민족’ 전체에게도 반역을 저지른 것이다. 마땅히 전쟁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했어야 함에도 그는 그러기는커녕 그 반대로 행동했다. 유엔에 대한민국 불인정을 촉구함과 동시에 미소 양군 철수를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미군을 잡아두기 위해 고심했던 것과는 크게 대비된다. 

미소 양군 철수는 곧 힘의 절대적 우위를 점한 북한군의 남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소련이 초지일관 줄기차게 양군 철수를 주장했던 것도 그런 속셈을 감춘 것이었다. 북한점령 초기부터 막강한 군사력을 키워 온 소련으로서는 명분과 실리를 다 챙길 수 있는 방안이 양군 철수였으며, 실제에 있어서 양군 철수는 미군 철수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소련은 언제고 군대를 손쉽게 파견할 수 있기도 하지만 북한군의 무력이 압도적인 상황이라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그런 점을 뻔히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남침을 확신하고 있었으면서도 무슨 연유에서인지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주장을 고집했다.    

놀라운 점은 그런 사실이 널리 알려졌는데도 한국 사회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하다는 것이다. 김구의 ‘반역’은 연구자들에게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해왔고, ‘건국전쟁’을 보고서야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 이쯤 되면 사회가 발칵 뒤집힐 법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김구 신화가 강고하게 한국 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누구도 김구의 어두운 진실을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쓸데없이 대중의 눈총이나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린 듯 김구 신화에 젖어 있다. 신화의 가장 큰 배경은 이른바 ‘남북협상’이다. 당시에도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할 뿐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았지만 김구는 그걸 무릅쓰고 북으로 갔다. 후대 사람들이 그걸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미화한 덕분에 그는 신화가 될 수 있었지만, 사실 당시 김구는 정치적 돌파구가 절실했던 터라 하나의 승부수로 북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장덕수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생명이 사실상 끝난 상황을 타개하려는 시도가 ‘남북현상’이었다는 얘기다. 

38선상에 백범 김구 일행. 왼쪽부터 김신조, 백범 김구,
38선상에 백범 김구 일행. 왼쪽부터 선우진, 백범 김구, 김신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그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고 자못 비감하게 말했고, 대중은 지금도 이 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대한민국에 대한 모욕이다.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는 게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구하는 일이란 말인가. 자존심도 없이 새파란 나이의 김일성에게 도피처를 구걸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해방정국에서 북한의 운명을 한 손에 움켜잡고 힘을 행사했던 소련군 정치 장교들의 기록인 ‘스티코프 일기’와 ‘레베데프 비망록’이 공개되면서 김구의 남북협상 결단이라는 게 얼마나 허망하고 위선적이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아가 남북협상이라는 게 소련의 기획에 의한 것이었으며, 김구가 거기에 놀아났을 뿐임도 밝혀졌다. 그래도 김구 신화는 흔들리지 않았다. 역사를 정치화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물론 김구가 정부 구성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임시정부 간판을 메고 고난의 길을 걸었던 사실은 높이 살 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반역의 사실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애 대부분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다면 친일파로 낙인찍히는 게 우리 사회다. 그런데도 그를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우상화하고 성역화해 온 게 또한 우리 사회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지식인들조차 김구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 자기 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언제까지 이런 비정상의 사회를 두고 보아야 하나.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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