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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좌충우돌]남현희-전청조 사건 핵심은 젠더와 섹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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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좌충우돌]남현희-전청조 사건 핵심은 젠더와 섹스가 아니다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3.11.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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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이종근 시사평론가

주민번호 앞자리 숫자와 가슴 절제 여부에 집착하는 언론
남의 아이보다 꽃길 걷게 해주고픈 학부모들 열망이 핵심
지난 3월 7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해변에서 펜싱검을 들고 맨발로 펜싱을 즐기고 있는 남현희와 전청조. 사진은 남현희 인스타그램 캡처.
지난 3월 7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해변에서 펜싱검을 들고 맨발로 펜싱을 즐기고 있는 남현희와 전청조. 사진은 남현희 인스타그램 캡처.

전 펜싱 국가대표 선수 남현희를 둘러싼 사기사건의 여진은 그 어떤 사건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다. 상식의 궤를 벗어나는 상황과 증언들이 자고 일어나면 한가지씩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보니 쏟아지는 관련 기사의 홍수 때문에 점점 피로감이 쌓이고 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이 때다 싶은 황색 언론들은 전청조의 주민번호 앞자리, 성전환 수술 여부, 성관계 방법 등과 이와 관련된 남현희의 인지 여부 등에 초점을 맞춘 기사 제목을 달아 일반인들의 꺼져가는 호기심을 다시 살리려 애를 쓰고 있다.

밀려오는 짜증을 잠시 눌러두고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는 임신 테스트기니 벤틀리니 까르띠에 다이아몬드니 가슴 절제 수술이니 하는 것들을 다 사상(捨象)하면 마흔을 넘긴 펜싱 메달리스트와 20대 후반의 사기꾼이 만나서 공유한 목적과 목표가 남는다. 그게 바로 이 사건의 핵심이다. 서로를 이용해 자녀를 아이비리그라 불리는 미국 동부 명문대학에 보내고 싶은 학부모들에게 자녀를 ‘쉽게’ 입학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유혹해서 더 많은 먹잇감을 ‘아카데미’에 끌어들이는 것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된 목적이었다면, 이미 펜싱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었던 남현희의 명성을 기반으로 전청조가 별도의 아카데미를 만든다며 학부모에게 1인당 3억원을 요구, 그 돈을 남현희의 통장으로 보내게 해서 특정 액수를 채우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다.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아이비리그’와 ‘펜싱’에 현혹돼 아까워하지 않고 지갑을 열었다.

남현희가 운영하는 ‘남현희 펜싱 아카데미’의 블로그에 들어가면 “아이비리그 진학을 위해서는 펜싱이 필수죠”라는 머릿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블로그는 이어 “우리 아이 펜싱부터 시작해야겠어요!”로 시작해서 “중고등학생들에게 펜싱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강점으로 작용합니다. 실제로 미국에는 아이비리그를 포함한 40개 대학에 펜싱클럽이 있는데요...펜싱경기에 참여하여 입상 경력이나 국가대표의 추천서가 있으면 (이 대학들이) 가산점을 준다는 사실.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하면 안 되겠죠? 펜싱으로 입학 가산점도 받고 집중력 향상으로 학업 성적까지 잡는 기특한 스포츠가 되겠습니다~”로 끝을 맺는다.

이종근 시사평론가
이종근 시사평론가

우리나라에서 펜싱 바람이 뜨겁게 일기 시작한 것은 2012년 런던올림픽부터다. 펜싱 국가대표팀은 당시 메달 6개(금2, 은1, 동3)를 휩쓸면서 그 어느 때보다 열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펜싱 학원들이 한남동과 강남을 중심으로 우후죽순 생겨난 것도 이 때쯤이었다. 아이비리그를 꿈꾼다면 펜싱을 배워두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 펜싱을 하면 집중력이 향상돼 학업 성적도 오른다, 미국 상류층의 고급 매너를 미리 익혀둘 수 있다고 현혹하는 내용의 팸플릿이 유학 상담 커뮤니티에 공유되기 시작했다. 당시 펜싱 붐을 보도한다는 명분으로 포장해서 특정 펜싱 학원을 소개하는 내용의 기사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기사에는 어느 메달리스트가 가르치고 그 학원에서 누구를 어느 미국 명문대에 보냈다는 등의 ‘인증’ 리스트가 포함돼 있다.

물론 미국에는 펜싱 특기생을 선발하는 대학들이 있다. 미국 대학 입시에서는 대학수능시험(SAT)과 함께 체육 활동도 중시한다.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펜실베이니아·프린스턴·코넬·컬럼비아·예일·브라운 등 대학에는 유서 깊은 펜싱 팀이 있다. 펜싱대회 입상 경력이 있는 지원자에겐 입시에 가산점도 준다. 또 세인트존스·오하이오주립·웨인주립·듀크 등 펜싱 특기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대학도 있다. 2013년 5월 6일자 조선일보의 ‘'아이비리그 꽃미남' 미국 펜싱 대표, 왜 강한가 봤더니’ 제하 기사를 보면 미국 펜싱 국가대표 선수들이 속해 있는 대학들은 스탠포드대(알렉산더 마시알라스), 세인트존스대(레이스 임보덴), 노트르담대(게렉 메인하트), 펜실베이니아 주립대(마일스 챔리왓슨) 등 모두 명문대다.

펜싱은 죄가 없다. 펜싱을 하면 성품 계발, 인내심 함양, 팀에 대한 헌신, 자신감, 강인함 등과 함께 매사에 긍정적인 자세를 갖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다른 아이보다 ‘쉽게’ 미국 명문대학에 보내려는 욕망과 내 아이에게 미국 상류층의 문화를 ‘빨리’ 익히게 하고픈 ‘허세’에 있다. 2016년 5월 15일자 서울경제신문의 ‘"아이비리그 가야죠" 초등 입학하면 억대 골프·펜싱 과외’ 제하의 기사는 ‘우리 아이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최고급으로 덧칠하려는, 교육 환상에 엇나간 부모들의 실태를 담아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자녀에게 연간 수억원이 소요되는 펜싱 골프 승마를 가르치는 아카데미가 한남동과 강남, 제주도 일대에 성행하고 있고 이렇게 ‘투자’하는 이유에 대해 학부모들은 입을 모아 “귀족 스포츠가 미국 명문대로 가는 골든 티켓”이라고 답했다.

전청조가 남현희의 펜싱아카데미 학부모·코치 등에게 1인당 3억 원에 달하는 '아이비리그 진학 대비 고급 교육 프로그램'을 제안하면서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하기 유리한 스포츠 종목들로 알려진 펜싱, 아이스하키, 승마 등을 한데 모아 재벌가들을 상대로 비밀리에 프로그램을 기획한다고 사기를 친 이면에는 ‘귀족’에 대한 열망을 가진 학부모들이 존재한다. 전청조가 이 사건 초기 예절 학원을 차리겠다고 하면서 사기를 치며 투자금을 끌어 모으려 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접했을 때 처음에는 ‘예절’이라는 키워드에 투자할 사람이 있을까 했는데 펜싱을 통한 귀족 스포츠 매너라고 풀어보면 이해가 가능하다. 이렇게 자신의 자녀에게 다른 아이보다 특별하게 소수만 향유할 수 있는 그리고 먼저 상류층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픈 사람들의 열망이 남현희와 전청조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남현희 펜싱 아카데미’ 블로그는 그 ‘길’에 대한 소개로 끝을 맺는다.

“아이에게 더 나은 조건과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기회를 적절히 제공해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어떤 길이 꽃길이고 좀 더 수월한 길이라면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교육적으로나 건강면에서도 가치가 충분히 있는 펜싱. 그 배움의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이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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