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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좌충우돌]한중전 중국 클릭응원 90%는 좌파들의 응원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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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좌충우돌]한중전 중국 클릭응원 90%는 좌파들의 응원투쟁?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3.10.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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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이종근 시사평론가

1988년 서울올림픽 미국-소련 농구경기 때 일방적 소련 응원
PD 계열 운동권의 소련 지령에 의한 ‘조직적 응원 투쟁’ 일환
1988년 9월 28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미국과 소련이 농구 경기를 치르고 있다. 동영상 화면 캡처.
1988년 9월 28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미국과 소련이 농구 경기를 치르고 있다. 동영상 화면 캡처.
다음의 클릭응원 페이지
다음의 아시안게임 축구 8강 클릭응원 페이지 캡처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막을 내렸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인기 비인기 종목을 떠나 메달 색깔이나 순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모든 선수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또 경기 그 자체를 즐기는 모습을 보이며 명장면들을 연출해 경기 결과보다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시안게임 기간 동안 벌어진 일 중에 꼭 기억해야할 것이 또 있다. 포털 다음의 아시안게임 축구 8강 한중전 ‘클릭응원’에서 90% 대 10%로 중국을 응원한 클릭수가 한국을 응원한 클릭수를 압도한 사건이다. 의혹으로만 존재하던 특정국가의 여론조작 개입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계를 돌려 1988년 서울로 가보자. 1988년 9월 28일 잠실체육관. 88서울올림픽 남자농구 준결승전에서 미국과 소련이 맞붙었다. 72년 뮌헨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재격돌하는 빅매치였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 남자농구는 세계 최강으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남자농구가 처음 채택된 이래 한번도 우승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 신화가 깨진 것이 소련에 패한 1972년 뮌헨올림픽이었다. 그후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과 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서로 불참해서 맞대결이 성사되지 못했고 88년 서울에서 마침내 양국이 다시 격돌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경기 결과는 82 대 76으로 소련의 승리였다. 세계 언론과 미국 소련 양국 정부가 주목한 것은 그러나 경기 결과가 아니었다. 그날 잠실체육관은 붉은 깃발로 뒤덮였다. 낫과 망치를 그려넣은 소련 국기가 객석 곳곳에서 나부끼고 키릴문자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뜻하는 CCCP(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 세세세르)를 알파벳으로 착각해 “잘한다 씨씨씨피”로 나라명을 잘못 읽은 응원 구호가 경기장 지붕을 들썩였다. 그날 그 현장의 관중들은 소련을 열광적으로 응원했다. 한 통신사 기자는 “소련의 모스크바 홈경기 같았다”고 타전했다. 세계 언론들은 한국인들의 열광적 소련팀 응원을 대서특필했다.

이종근 시사평론가
이종근 시사평론가

그날의 광기 어린 분위기는 좌파 운동권의 ‘소련 응원투쟁’의 결과였다. 당시 학생운동을 장악하고 있던 NL주사파들의 전대협은 북한의 대남조직인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의 지령을 받아 “88올림픽은 영구분단을 획책하려는 미국과 그의 하수인인 군사독재정권의 음모이기에 결사 저지해야 한다”며 ‘88올림픽 저지투쟁’에 나섰다. 이에 반해 소수파였던 PD 계열 운동권들은 스스로 정통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소련의 ‘88올림픽을 사회주의권 위상을 높이는 친사회주의 선전의 계기로 삼아야한다’는 투쟁노선을 받들어 서울올림픽을 ‘반공이데올로기 무력화 투쟁’의 장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PD 계열 중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조직인 ‘여명그룹’은 미국 대 소련 남자농구 경기를 투쟁의 타깃으로 삼았다. 이 날의 응원투쟁을 주도했던 황성준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소설가 황순원의 손자,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시절 시위 도중 부상으로 왼쪽 눈 실명)이 쓴 ‘유령과의 역사투쟁’(미래한국미디어 간)에 따르면 당시 여명그룹은 훈련된 3학년 학생들로 하여금 각각 1, 2학년 학생 4~8명을 데리고 관중으로 위장해 체육관에 집결시켰고 그 수가 200여명이었다. 이들은 관중석 곳곳에 산재해서 ‘현장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준비한 소련 깃발을 흔들고 미리 훈련한 구호를 외치면서 ‘응원투쟁’을 벌였다. 이들의 조직적인 응원 선도에 일반 관중이 휩쓸렸던 것은 당시 운동권들이 획책한 반미 감정 확산도 한몫을 했다.

운동권들은 당시 ‘5·18’이 군부가 미국의 묵인 하에 저지른 학살이라며 미국 책임론을 들고 나왔고 미국의 한국 시장 개방 압력 또한 반미 감정이 불붙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여기에다 좌파들이 고의적으로 확대 재생산한 주한미군 관련 사건 사고들은 반미 감정이 불붙는데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주한미군의 10대 자녀 2명이 한국인 임신부를 폭행한 사건, 술 취한 주한미군들이 택시 요금을 내지 않고 이에 항의하는 택시기사에게 칼을 휘둘러 중상을 입힌 사건 등이 연일 지면을 덮었다. 그후 복싱 경기장에 ‘우리는 미국을 싫어한다’고 쓰인 플래카드를 든 여고생들이 등장했다. 2010년대 기밀해제된 미국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국 대사관은 올림픽 경기장에서 표출된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는 내용의 보고서를 본국에 올렸다. 미국 언론들은 6·25전쟁 당시 북한을 도왔던 소련을 응원하고 남한을 위해 싸웠던 미국에 야유를 퍼붓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한국에서 빚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자유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인 미국-소련 농구경기의 결과와는 정반대로 농구에서 이긴 소련은 이듬해 해체됐고 그에 따라 많은 국내 자생 좌파 운동권들의 자성과 전향이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푸틴과 시진핑과 김정은을 추종하는 좌파들의 또 다른 ‘응원투쟁’은 사회 곳곳에서 모습을 달리해서 벌어지고 있다.

다음 카카오에서 중국 응원에 클릭한 90%가 중국 쪽 댓글부대인 '우마오당(五毛黨·건당 0.5위안을 받고 댓글 쓰는 집단)'의 소행인지 아니면 자발적인 댓글부대 ‘쯔간우’인지는 모르지만 여명그룹같은 운동권 지도부에 현혹돼서 소련 만세 구호를 외친 1988년의 1, 2학년 대학생들처럼 얼치기 좌파들에 휘둘리며 중국 만세를 외치는 2023년의 여의도 홍위병들이 90%에 속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것도 미망(迷妄)일까.

 

* 이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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