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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우중민주주의에서 나라 구하기 '입법권을 제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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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우중민주주의에서 나라 구하기 '입법권을 제한하라'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3.01.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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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조남현 시사평론가

다수 의석이라고 입맛대로 법을 제정할 수 있게 허용
대부분 자유 국가들의 헌법에 국민 주권 조항이 없다
지난해 12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부결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부결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주의는 이상적인 제도일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이 코너에서 수차례에 걸쳐 강조했지만, 대중은 우중(愚衆)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일단 군중으로 모이게 되면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광기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군중, 곧 광장의 대중은 복잡한 설명을 원치도 않을뿐더러 복잡한 설명은 그들에게 통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명박 정부 당시와 같이 “미친 소 싫어!”와 같은 단순하고도 무지한 선전‧선동에 반응한다. 그 무지한 대중의 다수결에 의한 정치적 결정은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도 거기서 비롯된다.

한국 사회는 자유 사회가 아니다. 모두 자유를 말하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자유는 심기를 매우 불편하고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일이지만 거기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라고 한다면 다들 꺼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유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에히리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고, 전체주의의 등장이 그러한 본성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밝힌 명저다.

사실 책임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럽다. 게다가 우리는 공동체에 기대 살았던 오랜 기억에 갇혀 있다. 우리의 DNA 속에는 공동체와 묶여 있는 원시적 속성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 인간의 의식, 나아가 본능 속에 내재한 본질은 공동체의 속성이다(우리 본능은 사회주의를 지향한다). 따라서 공동체에 의지하려는 것은 원시 공동체였던 구석기 시대로의 회귀와 다르지 않다.

조남현 시사평론가
조남현 시사평론가

그럼에도 한국인들 대부분은 과거로 회귀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이다. 스스로 책임지기보다는 공동체(국가 등)에 기대려 하는 게 그것이다. 사실 그런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도덕적인지는 의문이다. 말로 표현하는 바에 따르면 매우 인간적인 듯 보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매우 부도덕하다. 자기의 삶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려 하지 않는 노예의 심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의 다른 표현이다(두 사람의 사상적 토대는 다르지만). 문제는 한국인들에게 노예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보인다는 점이다. 스스로 책임지려 하지 않고, 국가에 의존하려는 심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사회적 연대니, 사회적 책임이니 하는 의식과 정부를 전지전능한 존재로 규정하려는 태도 등이 다 거기에 해당한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본인이 깨닫고 있는 아니든 대부분 사회주의에 우호적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성향을 보수로 규정하는 사람들조차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사회주의, 또는 국가주의 속성이 가득하다.

모두가 자유를 주장하면서 정작 책임은 지려 하지 않는 태도는, 거듭 말하지만 매우 부도덕하다. 그러나 한국인의 다수는 국가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건 자유인의 자세가 아니다. 매우 비겁하고도 교활한 태도다. 한국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피하기로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인들이 자유인이기보다는 노예의 길을 가려 하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그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fact)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례를 제시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진보가 무엇을 의미하는 거냐고 물으면 답하기를 곤혹스러워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방색과 정치적 파당의 성향은 있을지언정 진보와 보수, 또는 자유주의의 개념에 기반한 자기 철학 내지는 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하긴 그건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무지의 무지(스스로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가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란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정치제도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수의 의사라고 해서 반드시 옳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곧잘 다수의 독재가 문제가 되곤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다수의 횡포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하고 있다. 다수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바람에 윤석열 정부는 허울뿐인 게 현실이다. 제왕적 대통령제 운운하지만 그건 틀린 얘기다. 실상은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일당독재가 훨씬 더 큰 문제다. 대통령은 인사권만 갖고 있을 뿐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일당 독재권을 휘두르는 민주당은 중대 범죄 혐의자까지 ‘불의에 맞서는 정의의 사도’로 규정하며 우중을 선동한다. 이런 현실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다수의 독재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게 마련이다. 그런 뜻에서 다수의 독재, 곧 우중민주주의는 자유의 적일 수밖에 없다. 우중민주주의가 빚어내는 수많은 왜곡은 현실을 보다 나은 세계로 이끌기보다는 후퇴하게 만든다. 당장 민주당이 하는 꼴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무소불위의 힘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주권재민이라고 민주주의의 원리를 말하고 있지만 다 허망한 소리다. 광기 어린 우중을 빌어 다수 의석으로 법치마저 짓밟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주권재민, 곧 국민이 권력의 원천이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목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듯 현자(賢者)들이 지배해야 하는가. 그건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우선 현자들의 판단과 결정은 옳은가 하는 문제가 있고, 누가 현자이고 그걸 누가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1인 지배 체제를 대안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다다른 결론은 그래도 가장 덜 나쁜 제도가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결점이 많은 정치제도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민주주의는 가장 덜 나쁜 제도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된다. 그건 입법권의 제한이다.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해서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제정할 수 있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 결국 이 사안은 헌법의 문제로 이어진다. 흔히 개헌을 이야기할 때 대통령제냐 의원내각제냐를 말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국가의 권력을 제한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부든 의회든.

개인의 자유를 함부로 억압하는 입법은 허용하지 않으며, 다수의 횡포를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중 민주주의의 토대인 국민 주권 조항을 없애야 한다. 자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을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지만 대부분 자유 국가들의 헌법에 국민 주권 조항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달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이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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