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4-05-13 20:55 (월)
[조남현의 종횡무진]민주당의 입법폭주, 소크라테스도 다수결로 죽었다
상태바
[조남현의 종횡무진]민주당의 입법폭주, 소크라테스도 다수결로 죽었다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2.05.05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 조남현 시사평론가

민주주의 치명적 약점 소수가 옳을 수 있음에도 다수결로 진실 왜곡
‘검수완박’ 꼼수와 무원칙의 국회, 변칙적인 국무회의를 거쳐 완성
소크라테스의죽음 ⓒPixabay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작품. 1787년. ⓒPixabay

이른바 ‘검수완박’의 폭거가 온갖 꼼수와 무원칙의 국회 운영은 물론 변칙적인 국무회의를 거쳐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떠올렸다.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신(神)을 믿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아테네 법정에 섰다.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혐의는 그가 사람들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그건 델포이 신탁에서 비롯된다.

델포이 신탁은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는데,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탁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지혜롭다는 평판을 얻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문답법을 통해 그들이 결코 지혜롭지 않다는 점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그 점을 인식시키려 애쓰는데 그 바람에 그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 사람과 나는 똑같이 선(善)과 미(美)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 왜냐하면 그는 모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나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알지 못한다. 무지의 무지다. 왜 그럴까. 인간은 본디 무지하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하면서도 인간 이성이 완전하다고 믿는 무지몽매한 존재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이 신의 자리를 대체했지만, 아니 대체했다고 믿었지만 그건 오만이었다. 하이에크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해 인간의 치명적 자만의 결과라고 일갈한 것은 그런 점에서 탁월하다.

조남현 시사평론가
조남현 시사평론가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혐의인 신을 믿지 않다는 것도 정연한 논리로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논증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운 멜레토스는 끝까지 소크라테스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우긴다. 소크라테스는 얼마든지 우매한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소신을 접을 수도 있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러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진리탐구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무죄 방면해준다 해도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진리탐구는 신이 그에게 부여한 소명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판결은 유죄 280표, 무죄 220표로 결론이 났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는지를 발견한다.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정치적 행위의 결과로 유무죄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게다가 표차는 불과 60표다. 소크라테스가 지적했듯 30명만 무죄에 표를 던졌어도 소크라테스는 무죄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우중(愚衆) 민주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실 여부가 다수결로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인가. 다수가 그렇다고 주장하면 그게 진실이 되는가. 아니다. 사실 여부는 다수결로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백 명 중 단 한 사람만이 주장한다 해도 그게 옳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치명적 약점은 소수가 옳을 수 있음에도 다수결로 밀어붙여 진실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니 이제 어떤 형을 내려야 할지가 다시 투표로 가려지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판관들과 아테네 시민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은 형벌이 아니라 보상이어야 할 것이며, 적합한 보상은 프뤼타네이온(외국 사절이나 자국에 공로를 세운 사람들 혹은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쓴 사람들을 환대하는 건물)에서 식사대접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아테네인들에게 진짜 행복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재판관들을 자극했고,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예견한 것이지만. 이 역시 우중 민주주의의 결과다.

고대 그리스에서 벌어진 이런 일이 현대 민주주의에서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당장 작금에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른바 ‘검수완박’ 소동이 그런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를 죽였다면 우리 사회는 정의(justice)를 죽였다. 소크라테스는 ‘진실’과 ‘정의’ 혹은 ‘진리’를 상징한다. 우리 사회는 진실을 죽인 아테네의 우중 민주주의로 상징된다. 이럴 때 민주주의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소크라테스라는 진실을 죽였다. 앞장선 사람들은 범죄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지만 실상은 우리 사회 전체가 만들어낸 결과다. 거듭 말하지만 진실은 덮이지 않는다. 240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소크라테스가 그걸 웅변하고 있지 않는가.

아무리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결코 진실을 가리지는 못한다. 그리고 역사는 반드시 진실을 드러낸다. 역사 앞에서 추한 몰골을 드러낼 것인가. 잠시 살려고 영원히 죽을 것인가. 제발 좀 멀리 내다보고 역사 앞에서 당당하기 위해 오늘을 바로 살기 바란다. 이래도 계속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내몰 것인가.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