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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좌충우돌]이준석 살린 판사와 심심한 사과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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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좌충우돌]이준석 살린 판사와 심심한 사과 소동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2.09.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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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이종근 시사평론가

지켜야할 말과 없애야할 말의 구분부터 해야
검찰은 부디 명징한 표현으로 여죄 가려주길
왼쪽부터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 이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왼쪽)가 지난달 17일 오후 서울남부지법에서 당 비상대책위원회 효력을 정지해달라며 낸 가처분 신청 사건의 심문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오른쪽)가 지난 2일 오전 광주 서구 치평동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뉴턴의 사과도 잡스의 사과도 아닌 ‘심심한 사과’가 대한민국을 흔들어 놓았다.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뜻의 ‘심심(甚深)하다’라는 말을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의미의 심심하다로 잘못 이해한 댓글들 때문에 문해력 부족, 한자교육 부재 등의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심심하다는 말은 사과만이 아니라 고마움을 표현할 때도 쓸 수 있다. 상대방에게 나의 감정을 전달해야할 때 특히 사과나 감사의 경우 어느 정도의 사과인지 감사인지를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형식적인 인사말로 비치고 싶지 않을 때 정중하게 건네는 말이 심심하다의 형용사인 ‘심심한’ 그 무엇이다. 심심한 위로, 심심한 사의, 심심한 유감... 모두 나의 품격을 지키면서 상대방과의 관계를 지속시켜줄 수 있는 관용어다.

이 논쟁을 보면서 3가지 관점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첫째는 지루하다는 의미로만 알고 있었는데 간절하다는 본뜻을 알게 됐을 사람들의 “그래서 어쩔?” 식 반응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모른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만 내가 그 것을 정확히 알아나갈 수 있다. 무엇인가를 알아나간다는 것은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가능하다. 모르는 것을 몰랐을 때 그 모르는 것은 평생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심심한 ~’이라는 관용구를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그것은 기쁜 순간이어야 한다.

시사평론가
시사평론가

둘째 ‘심심한 사과’를 ‘맛없는 과일’로 이해한다고 해서 “이래서 망조”라고 맹공을 퍼붓는 세태다. 세대갈등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기성세대가 피해야할 습관은 ‘라떼는 말이야’다. 짜장면은 중국어 炸醬이 음성학적 측면에서 자장으로 읽히므로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고 자장면이 맞다고 수십 년 써왔지만 2011년 국립국어연구원이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면서 국어사전에 등재하게 됐다. 일부 식자층에서만 사용되던 자장면은 아예 소멸됐다. 대중이 안 쓰기 때문이다. 말은 살아있는 생물이다. 끊임없이 사라지고 생겨나고 바뀔 수 있다. 가르치고 교육하고 고집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심심하다를 몰랐다고 탓하는 사람들에게 정작 한자로 써보라고 하면 자신 없어 하실 분들이 있을 것이다. 모르고 아는 것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세 번째의 불편함은 둘째의 이유로 말미암아 심심하다는 또 하나의 표현이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쓰지 않는 말은 소멸한다. 대표적인 말이 ‘이르다’다. 이르다는 빠르다와 다르다. 이르다는 '일이나 그 시기가 다른 일정한 기준보다, 또는 일을 하기에 시간상 앞서 있다'는 뜻이고 빠르다는 ①어떤 동작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다 ②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나 기간이 짧다는 뜻이다. 이르다는 영어로 early 한자로 早, 빠르다는 fast 速이다. 그러나 지금 대중들은 이르다로 써야할 상황을 모두 빠르다로 쓰고 있다. “의사는 그녀에게 퇴원을 하기에는 너무 빠르다고 말했다” “그 실험이 성공했다고 하기에는 아직 빠르다” 여기서 쓰인 빠르다는 모두 이르다의 잘못된 용례다. 신문에서조차 ‘이른 시일내에’를 ‘빠른 시일내에’라고 쓰고 있다.

다중의 선택이 말과 글을 좌우한다. 우리를 풍요롭게 해준 말들을 사라지지 않게 지키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일상에서 쓰지 않는 말은 소멸의 1순위 대상이다. 새로운 세대들에게 말과 글이 잊히지 않게 하려면 웹툰이나 웹드라마 작가, 게임 기획자, 인플루언서, 유튜버 등을 포섭하는 것이 한자교육의 부활보다 더 확실한 방법일지 모른다. 그들이 자신의 미디어를 통해 한번이라도 사용한 어휘는 쉽게 소멸하지 못할 테니까.

인위적으로 소멸시켜야 하는 말과 글도 있다. 이준석을 일시적으로 살리는 산소마스크 역할을 했던 법원의 결정문에 ‘도과’라는 표현이 나온다. 판사는 결정문의 뒷부분 소결에서 ‘주호영 비대위원장이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당대표를 선출할 경우 당원권 정지기간이 도과되더라도 채권자(이준석)가 당대표로 복귀할 수 없게 되어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므로’ 채무자인 주호영은 비대위원장 직무를 집행해서는 안된다고 적시했다.

위 문장에서 ‘도과’는 우리말이 아닌 일본식 한자다. 당연히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도과(徒過)는 '시간이 지나가다'라는 뜻으로 우리말로는 '경과(經過)'가 있다.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을 판사가 공적 문서인 결정문에 사용하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자신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도 아니고 대중이 쉽게 알아듣지도 못하는, 더군다나 우리말도 아닌 해괴한 용어를 버젓이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꼰대의식’ 때문이다. 그 결정문을 받아든 사람들에게 우월적 지위와 권위를 과시하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이라면 무조건 죽창을 들어야한다고 선동하는 진영에서 일본식 한자를 쓰는 판사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국민의힘에 그 판사의 결정을 따르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참으로 해괴하다.

집권당과 제1야당의 당대표가 한날 한시 검찰에 출두하게 생겼다. 이준석 이재명 이 두 정치인의 논점 돌리기는 막상막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신군부라는 표현으로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비판을 열람용 탄원서를 언론에 공개한 책임을 묻는 것으로 돌리는 이준석이나 국정감사 등을 통해 있지도 않은 국토부의 ‘협박’을 입에 올리며 자신의 측근이 시행사에 임원으로 임명된 직후 용도변경을 허가한 의혹을 ‘말꼬투리 잡기 프레임’으로 바꿔버린 이재명이나 현란한 말놀림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검찰은 어떤 명징한 표현으로 이들의 여죄를 밝혀낼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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