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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좌충우돌]퇴계 이황이 이재명과 조국과 김준혁을 꾸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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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좌충우돌]퇴계 이황이 이재명과 조국과 김준혁을 꾸짖다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4.04.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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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이종근 시사평론가

성현이 말조심했던 것은 실천이 못 미침을 경계했기 때문
자신의 언행불일치를 부끄럽게 여기는 수오지심을 가져야
1915년 촬영된 퇴계 이황 묘소. @국립중앙박물관
1915년 촬영된 퇴계 이황 묘소. @국립중앙박물관

22대 총선도 이제 10여일이 지나갔다. 선거야 원래 ‘피 안 흘리는 전쟁’이라지만 이번 총선은 유난히 금도를 넘는 폭언과 망언과 극언으로 많은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퇴계 이황 선생에 대한 몹쓸 발언이 남긴 혐오감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대학교수라는 자가 그것도 사학자라는 자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을 주고는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 자가 언급한 퇴계호색설은 학계에서도 정설이 아닌 저잣거리 야사로 취급하고 있고 이미 고려대 한문학과 김언종 교수가 논문을 통해 허구임을 입증했다. 이황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근대 중국과 일본의 지식인으로부터 주자(朱子) 이후 제일 가는 성인으로 대우하고 있고 미국의 유수 대학은 물론 독일 일본 대만 중국 등 많은 나라에서 동방의 스승으로 불리며 '퇴계학'을 가르칠 정도로 추앙받는 학자다.

공자 맹자 순자 노자 주자 한비자 등 성씨 뒤에 ‘자(子)’를 붙이는 사람은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 인물에 붙는 접미사 ‘자(子)’는 아무에게나 쉽게 쓰지 않는 특별한 칭호, 즉 스승(master)을 뜻하면서 학문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이자(李子)가 있다. 퇴계 이황이 바로 이자다. 실학자 이익이 퇴계 이황의 글 가운데 좋은 것을 뽑아 엮은 일종의 명언명구집 이름이 ‘이자수어’(李子粹語)다. 이익은 “우리 동방 사람이 존모(尊慕)할 분으로는 퇴계보다 앞설 이가 없으므로 ‘이자’라 부른다”고 설명했다.

이종근 시사평론가
이종근 시사평론가

‘조선왕조실록’ 선조 3년 12월 1일 융경(隆慶) 4년 편을 보면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이황의 졸기’ 제하의 서술에서 “이황은 이 세상의 유종(儒宗)으로서 조광조(趙光祖) 이후 그와 겨룰 자가 없으니, 이황이 재주나 기국(器局)에 있어서는 조광조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의리(義理)를 깊이 파고들어 정미(精微)한 경지까지 이른 것은 조광조가 미치지 못한다”고 당대의 이황을 평가했다. 여기서 유종은 유학의 선비들이 우러러보는 큰 학자를 뜻한다.

조선왕조실록은 또 “이황은 예법으로 자신을 지키면서 남의 조롱이나 비웃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상한 뜻과 차분한 마음을 가졌다. 비록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과거를 통해 벼슬을 하기는 하였으나 통현(通顯 : 높은 지위)되기를 좋아하지는 않았다...(중략)...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확립되자 더욱더 겸허하였으므로 그에게 배우려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달관(達官)·귀인(貴人)들도 마음을 다해 향모(向慕)하였는데, 학문 강론과 몸단속을 위주하여 사풍(士風)이 크게 변화되었다”고 생전의 이황을 평하고 있다.

이황은 언행일치를 몸소 실천하여 후대의 귀감이 되었다. 사후 제자들이 편찬한 ‘언행록’ 1권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선생이 이덕홍에게 회답한, 경(敬)을 논한 편지를 한 통 베껴서 벽에다 붙여 두셨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일찍이 옆에 모시고 있다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니 선생은 “내 비록 남을 가르치기는 이렇게 했지만, 내 몸을 돌이켜 살펴볼 때는 아직 스스로 다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고 답했다.' 이황은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황은 생전에 1000통이 넘는 편지를 써서 남겼다. ‘자성록’은 이황이 그간 써왔던 편지글들을 모아 58세에 펴낸 책이다. ‘자성록’이라 칭한 데 대해 그는 편지글을 반성의 자료로 삼기 위해 그랬노라고 밝히고 있다. 자성록에는 다음과 같은 경구가 있다. “옛 성현들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아니한 것은 실천이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였기 때문이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대표적인 언행불일치로 ‘조로남불’이라는 신조어를 남겼다. 내로남불로 조국이 비판받자 조국을 옹호하는 무리들은 ‘조국백서’를 통해 “예로부터 지배세력 내 개혁가들은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며 개혁가들까지 싸잡아 모욕했다. 그들 주장과는 달리 옛 성현들은 언행일치를 위해 노력했고 부족하다고 느끼면 부끄러워했다.

이황은 56세 되던 1556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예안에 돌아온지 10년이 되던 해에 ‘향립약조(鄕立約條)’를 지었다. 향립약조는 ‘예안향약’으로 불리는 예안 지역의 향약(鄕約)이다. 이황은 향립약조를 통해 향촌의 지배계급인 재지사족(在地士族)이 ‘치향지인(治鄕之人)'으로서의 자기 규제와 솔선수범 그리고 상호 간의 상부상조를 이루게 함으로써 이상적 향촌자치를 만들고자 했다. 이웃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부끄러움(羞惡之心)을 갖게 하고, 양보(辭讓之心)할 줄 알고 옳고 그름(是非之心)을 제대로 가릴 수 있게 함으로써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게 하는 것이 향립약조의 목적이다.

이황이 향립약조에서 규제한 행동 유형은 “망령되이 위세를 부려 관청을 소란스럽게 하고 마음대로 하는 자”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사풍(士風)을 더럽힌 자”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며 사납게 행동하여 싸움을 일으키는 자” “염치없이 막 돼먹은 자들과 붕당을 만들어 난폭한 짓을 많이 하는 자” “헛된 말을 조작하여 남을 죄에 빠뜨리는 자” “관청의 임명을 받고 공무를 빙자하여 폐단을 일으키는 자” 등이다.

192석을 점유했다고 삼권분립을 위협하며 행정부의 권한인 재정 집행까지 처분적 법률이라는 위헌적 발상을 통해 좌지우지하려 하고 사법부에 대해서는 민주적 통제라는 미명하에 판결과 재판 진행 절차까지 간섭하려 들며 사적인 복수를 위해 공적인 권한을 남용하려 들고 검찰청 술자리라는 가짜뉴스를 지어내 대표의 사법리스크를 모면하려 드는 자들이 새겨 들어야할 규범이다.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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