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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이승만이 임시정부 첫 대통령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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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이승만이 임시정부 첫 대통령 된 이유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4.03.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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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조남현 시사평론가

영화 '건국전쟁'이 못다 한 이야기②
한성감옥에서 태어난 한국 최고의 지성
지난달 28일 서울 한 영화관의 상영 시간표에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과 '기적의 시작'이 띄워져 있다. '건국전쟁'은 지난 27일 누적 관객 수 1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배급사 다큐스토리가 밝혔다.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서울 한 영화관의 상영 시간표에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과 '기적의 시작'이 띄워져 있다. '건국전쟁'은 지난달 27일 누적 관객 수 1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배급사 다큐스토리가 밝혔다. ⓒ연합뉴스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대중을 감동케 하며 흥행의 돌풍을 일으킨 것은 오랜 기간 왜곡되어 온 이승만의 진실을 관련 사진이나 영상 자료를 통해 바로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사실(fact)의 힘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디테일(detail)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제한된 시간 내에 이승만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해되기는 하지만 왜 이승만이 한국 근현대사의 거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우리 국민은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 다 알고 있지만,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며, 그 정부 수반으로 이승만이 추대되었다는 사실과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 첫 대통령이 이승만이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지 못한다. 초‧중‧고등학교 한국사 관련 교육이 이와 같은 사실을 철저히 은폐해 왔기 때문이다. '건국전쟁'도 이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상해 임시정부라고 하면 김구(金九)를 떠올릴 뿐 이승만은 관련 인물로 떠올리지 못한다.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가 섰을 때 김구는 경무부장의 직위에 있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는 상해로 안창호(安昌浩)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시켜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명망가들에 견주어 보잘것없는 자신의 위상을 감안하여 무슨 역할이든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게 아닌가 싶다. 아마도 임시정부 첫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보기에 김구가 거구인데다가 힘도 좋아 보여 대통령 경호와 치안을 맡기면 제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남현 시사평론가
조남현 시사평론가

그런데도 왜 김구가 상해 임시정부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을까. 그건 파벌 싸움으로 명망가들이 임시정부를 떠난 뒤에도 끝까지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켰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간판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며, 그런 점에서 김구의 공로는 높이 평가받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첫 대통령이 이승만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는커녕 오히려 감추어 온 것은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하야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확실히 비정상이다. '건국전쟁'이 감동을 주는 것도 이 비정상의 세상에서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3‧1운동 직후 세워진 임시정부 중 대표적인 것은 한성 임시정부, 노령 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다. 한성 임시정부는 여타 임시정부가 해외에 근거하고 있는 것과 달리 국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한성 임시정부는 오늘의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홍진, 이규갑, 장붕 등이 비밀 ‘독립운동본부’를 거점으로 극비리에 각지의 중심적 인물들을 접촉하여 추진했다. 이들은 3‧1운동 한 달여 뒤인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맥아더 동상이 있는 지금의 자유공원)에서 전국 13도 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여기서 ‘한성정부 조직안’과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약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임시정부 수립 근거를 만들었다. 이어 4월 23일 서울에서 24명으로 조직된 전국 13도 대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선포하며 정부 수반인 집정관 총재로 이승만을 추대했다.

그 무렵 상해에서도 국내외 명망가들이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안창호 등이 중심이 되어 4월 13일 국무총리를 정부 수반으로 하는 내각제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국무총리에 이승만이 추대되고,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으로 내각을 구성했다.

이렇듯 임시정부가 두 개나 생겨났으니 난감한 일이었다. 거기다가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노령(러시아령) 연해주에서 3월 17일 기왕에 있던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하여 임시정부를 선포한 상태였다. 이를 노령 임시정부라 한다, 노령 임시정부는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했다.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즉각 통합 논의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임시정부가 세 갈래로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행정부 조직을 보면 명망가들의 면면이 비슷하다는 점, 하나의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다들 동의하고 있었기에 통합 논의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통합 임시정부가 상해임시정부였다.

여기서 보듯 이승만은 임시정부 세 곳에서 모두 정부 수반(한성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이거나 실질적 수반(노령임시정부)이었다는 점에서 통합 임시정부 수반으로 추대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그가 정부 수반으로 추대된 것은 국내외 한인 사회나 명망가들 사이에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어떤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통합 임시정부 출범 후 얼마 되지 않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 수반을 국무총리에서 대통령으로 바꾸는 개헌을 함으로써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다. 이는 이승만이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로 자신이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포하는 외교문서를 ‘프레지던트(president)’ 명의로 주요국 수반에 보내놓은 상황인데다가 국제 외교에서 대통령 직함이 더 유리하다는 점 때문에 이승만이 요구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렇듯 이승만이 전민족적 염원을 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대통령이었음에도 대다수 국민은 이러한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대중매체에서도 독립운동 관련 프로그램을 내보낼 때 임시정부 첫 대통령 이야기는 쏙 빼고 부정적인 이야기만 쏟아내는 게 저간의 사정이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 7월   ⓒ대통령 기록관 캡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 7월 취임식 선서를 하고 있는 모습 ⓒ대통령 기록관 캡처

그렇다면 이승만은 어떻게 그런 위상을 갖게 되었을까. '건국전쟁'은 이에 대한 설명을 생략했다. 이승만이 아무리 걸출한 인물이라 해도 당시 국내외 한인 사회나 이름깨나 있다는 명망가들 사이에서 높은 명성을 얻지 못했다면 여러 임시정부에서 정부 수반으로, 그리고 드디어는 통합 임시정부 대통령의 자리에 추대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임시정부 조직 명단을 보면 지금까지도 그 위상이 대단하게 평가되고 있는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는 가운데서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 '건국전쟁'에도 소개되었지만, 이승만은 청년 시절이던 구한말 아펜젤러(Henrly G. Appenzeller)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들어가 선진 서양문명을 접하며 자유‧평등‧민권 등의 가치를 내면화했다. 이영훈 이승만 학당 교장은 이승만을 한국인 최초의 자유주의자라고 평가한다.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을 배출한 배재학당은 대한민국의 탯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이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한 건 배재학당 졸업 후 독립협회에 가입해 만민공동회의 명연설가로 이름을 날리면서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등에 고종의 보수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싣는 한편 과격한 반정부 시위를 조직하며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등 급진적인 정치 개혁 운동을 벌였다. 그건 목숨을 내놓고 하는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었다. 결국 그는 1899년 1월 9일 체포돼 언제 처형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다행히 선교사들의 구명운동으로 사형은 면하고 무기수로 복역하게 되었다.

평생 감옥에서 썩을 수밖에 없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삶에의 의지가 무너질 수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이때부터 이승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한성감옥 수감 기간에 이승만이 이 나라 최고 지성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이 사실상 이승만 혼자 주도했다고 보아 무리가 없다는 점에서 한성감옥 수감 기간은 대한민국의 시간이 시작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은 고종의 특사로 석방될 때까지 5년 7개월 동안 선교사들이 넣어준 수많은 영문 및 한문 서적을 탐독하며 서양문명 등 폭넓은 지식을 쌓았고, 서양의 신문잡지를 통해 국제정세를 훤히 꿰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1999년 펴낸 유영익 교수(2023년 작고)의 논문 '우남 이승만의 옥중잡기 백미(雩南 李承晩의 獄中雜記白眉)'를 보면 청년 이승만의 공부량과 지적 수준 및 깊이를 알 수 있다.

‘옥중잡기’는 오랫동안 이화장(이승만의 사저)에 비장(秘藏)되어 있던 ‘우남 이승만 문서’ 중의 하나로 이승만이 남긴 문서 중 가장 앞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승만이 한성감옥 수감 당시 쓴 원고라는 말이다. 150페이지에 달하는 ‘옥중잡기’ 속에는 한문, 국한문 및 영문으로 쓴 여러 가지 주제와 양식의 친필 원고가 수록되어 있다. 그중 특별히 눈에 띄는 기록이 있다. 이승만이 미국 공사에게 보내려 쓴 공개서한이 그것이다.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미국인 선교사들은 그의 석방 운동을 펴고 있었다. 하지만 조정은 좀처럼 이승만을 풀어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에 급기야 서울 주재 미국 공사 알렌(Horace N. Allen)까지 나서 대한제국 외부(外部:외무부:필자)와 주한 일본 공사관과 교섭하여 이승만을 조속히 풀려날 수 있도록 움직이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미국 공사에게 그러한 행위는 한국(대한제국)의 독립을 저해하는 일이라며 만류하는 서한을 쓴 것이다.

이승만은 얼마 되지 않아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어 이 서한은 공개되지 않은 채 ‘옥중잡기’에 남겨졌기에 일반 대중은 물론 연구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문서는 근대화 혁명가 이승만의 기개와 지사적 풍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를 곡해하거나 왜곡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기회주의적이며, 그의 독립운동도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다는 근거 없는 비방을 서슴지 않지만, 한국이 독립 국가로 바로 서는 데 대한 그의 열망이 얼마나 크고 진정성이 있었는지를 이 서한은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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