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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 분신 사망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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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 분신 사망의 사회학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3.05.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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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조남현 시사평론가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과 투쟁의 동기로 삼는 것은 구분해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일은 가장 부도덕한 것
민주노총 건설노조 관계자 등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인근 한강대로에서 정부규탄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노총 건설노조 관계자 등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인근 한강대로에서 정부규탄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노총 산하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지대장 양회동 씨가 지난 1일 분신 사망했다. 조선일보는 ‘사건 당시 현장에 같이 있었던 동료가 분신 순간 '막지도 불을 끄지도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에 건설노조는 왜곡이라며 해당 기사를 쓴 기자와 데스크 등을 고소했다. 분신 방조에 대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8~9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 현장에서 ‘저항’으로서의 분신 사망 사건이 많았다는 사실이 하나의 시사점을 주고 있다. 당시 급진 노동운동 세력에게 ‘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는 구호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분신은 극단적인 분노를 드러내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보통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분노를 표하기 위함이라 해도 분신을 하기 어렵다. 분노가 아무리 깊고 크다 하더라도 스스로 분신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지난 칼럼에서 목적이어야 할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좌파의 부도덕함을 지적한 바 있지만, 분신은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인간을 수단화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답은 ‘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는 말에 있다. 

분신은 극단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인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의 분노는 일상에서는 발생하기 어렵다. 그건 개인의 감정을 넘어선 분노에서만 가능하다. 개인의 감정을 넘어선 분노, 그건 자본가로부터 착취당하는 노동계급이라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의식은 적의(敵意)로 가득하다. 8~9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 세력이 입버릇처럼 말한 “한 줌도 안 되는 자본가 무리를 쓸어버리고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건설하자”는 구호는 그런 적의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조남현 시사평론가
조남현 시사평론가

계급의식은 사실 ‘주어진’ 것이다. 과거 우리 근로자들은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정당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적의로 가득한 계급의식이 자연발생적으로 근로자들을 지배할 정도로 ‘착취’당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경제가 발전할수록 근로자의 권익도 함께 커졌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가 계급의식을 강조했던 19세기 유럽의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분신을 감행할 만큼의 강한 적개심과 분노를 유발하는 계급의식이 많은 근로자를 포획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과거 곧잘 언급되었던 ‘의식화’를 통해서였다. 그러기에 계급의식이 ‘주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8~9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 세력이 결집해 만든 게 지금의 민노총이다. 급진 노동운동 세력의 목표는 계급혁명이었다. 따라서 전투적일 수밖에 없었다. 혁명은 쟁취하는 것이지 협상으로 이루는 게 아니다. 노동조합은 혁명의 주력군 중 핵심이고, 8~90년대 이념성이 강한 노동조합은 노사협상에 나서기 어려웠다. 노사협상을 통해 아무리 많은 성과를 얻어도 그건 투쟁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서 비판의 대상이었다. ‘조합주의’라는 비판은 급진적 노동운동에서 ‘반동’이라는 말과 같은 모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민노총이 ‘투쟁’으로 오로지하는 것은 그런 배경에서가 아닐까 한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계급혁명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런데도 전투적 노동운동이 사라지지 않는 가운데 또 분신 사건이 터진 것은 미스터리다. 사망한 양 씨가 계급의식에서 비롯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분신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 건설노조가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분노의 표출 양식이 8~90년대 전투적 노동운동과 다름없다는 건 분명하다. 희생자를 ‘열사’로 떠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분신을 투쟁의 동기로 삼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콩트에 이어 사회학을 과학으로서의 학(學)으로 자리매김한 뒤르껭(Durkheim)은 자살을 분석하여 이타적 자살, 이기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숙명론적 자살 등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는데, 노동운동에서의 분신은 이중 어느 유형으로도 분류하기 어렵다. 분신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개인의 감정을 넘어선 분노의 표출이라는 점 때문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분신이 과연 집단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양으로 바친 것인가. 결코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또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일은 가장 부도덕한 것이다.

 

*이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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