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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22대 총선 민주주의 이대로 망가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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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22대 총선 민주주의 이대로 망가지나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4.04.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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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조남현 시사평론가

플라톤을 위한 변명 민주정 혐오를 넘으려면
국민에 머물지 말고 자유로운 시민으로 거듭나야
플라톤 ⓒiStock
플라톤 ⓒiStock

이번 총선을 지켜보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더 큰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이번 총선에서 민주주의의 퇴행을 반전시킬 동력이 나타날 수 있을까 기대도 해보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민주주의 자체가 본래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왜 그리도 민주정을 혐오했는지는 새삼 이해하게 됐다.

플라톤은 민주정 자체가 문제라고 봤다. 그가 그렇듯 민주정을 혐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민주정이 위대한 철학자이자 성인이었던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였으니까. 지금 보면 더욱 그렇겠지만 당시 아테네 시민 법정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유죄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나아가 설사 유죄라 하더라도 추방도 아닌 사형을 판결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지 않은가. 그러니 플라톤이 아테네 민주정을 좋게 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플라톤이 전체주의의 시초가 된 것을 그동안 이해하지 못해 왔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아테네의 민주정보다 스파르타의 과두정을 더 나은 제도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도 플라톤은 아테네 민주정보다 스파르타의 과두정을 더 높이 샀다. 나아가 그의 이상에 부합하는 정치체제라고 봤다.

조남현 시사평론가
조남현 시사평론가

플라톤은 인간의 역사를 이데아의 퇴조로 이해했다. 따라서 이데아, 곧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배계급을 양성함으로써 이상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서양 정신문명의 시조로 평가받는 그가 아테네의 민주정보다 스파르타의 과두정을 더 이상적인 정치제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플라톤이 스파르타를 높이 평가한 것은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계급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신분에 따른 계급 질서를 엄격하게 유지한 국가였고, 이를 위해 소수의 지배계급은 피지배 계급이 다수인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혹하리만치 철저한 훈련을 통해 후대를 육성해 냈다. 그뿐만 아니라 갓 태어난 아이 중 약골은 버리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플라톤은 그런 스파르타의 관행을 옹호했다.

플라톤 같은 현자가 엄격한 계급 질서를 옹호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그는 지배계급과 국가의 운명을 동일시했다. 그래서 그는 “지배자는 지배하고, 노동자는 노동하고, 노예가 노예일 수 있다면, 국가는 정의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플라톤은 “현명한 자는 이끌고 통치해야 하며, 무지한 자는 그를 따라야 한다”고까지 했다.

오늘날 플라톤의 이러한 사고에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건 필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 사회를 오래 지켜보면서 플라톤을 이해하게 됐다. 그가 오죽하면 “현명한 자는 이끌고 무지한 자는 따라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을까. 그는 우매한 대중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중을 동원하는 중우정치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플라톤의 고민에 공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칼 포퍼는 그의 저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을 전체주의의 원조라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전체주의의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를 낳은 마르크스 앞에 헤겔의 역사주의가 있고, 헤겔 역사주의의 시초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것이다. 포퍼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확실성을 지닌 지식을 이성의 정신적 눈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며, 이와 같은 지식관은 오늘의 과학적 지식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문제는 플라톤이 왜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을 가정하고 그걸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런 터무니없는 믿음을 바탕으로 ‘이상 국가’를 공상했을까 하는 점이다. 어리석은 대중에 의한 민주정을 믿을 수 없기에 그랬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건 지적 오만이었다. 인간이 계획에 의해 이상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발상 자체가 잘못이다. 플라톤이 비록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려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후대에 끼친 영향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렇지만 플라톤이 고민했던 까닭만큼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탓에 정책의 내용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뿐 아니라 곁가지라고도 할 수 없는 사소한 문제들만 가지고 정부가 잘하느니 아니니 따지는 우매한 대중에게 뭘 기대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플라톤이 왜 그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집합체로서의 대중을 불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민주정이 아닌 다른 정치제도를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주정보다 덜 나쁜 정치제도는 없다는 역사적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민주정이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지금까지 나타났던 그 어떤 정치제도보다 더 나쁘지는 않으며, 같은 민주정이라 하더라도 나라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어떻게 개선해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게 합리적이다.

가장 최근 칼럼에서 정치는 자유인이자 시민이 하는 일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 연장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를 이루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국민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자유로운 시민으로 거듭나야 민주정이 바로 설 수 있다는 점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자유 시민은 ‘주어진(세뇌된)’ 확증편향에 매몰된 채 바람이나 분위기에 휩쓸려 남의 판단을 자기 판단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하고 그 결정에 온전히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국가 구성원이 자유 시민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우리의 민주정이 희망을 꿈꿀 수 있다.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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