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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좌충우돌]이승만ㆍ박정희가 밭을 갈고 윤석열이 씨를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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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좌충우돌]이승만ㆍ박정희가 밭을 갈고 윤석열이 씨를 뿌리다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3.08.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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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이종근 시사평론가

미국의 반대 속에 ‘태평양동맹’과 ‘아태조약기구‘ 추진한 이유
한반도 위기 상황을 외교 총력전으로 극복한 역사 잊지 말아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를 앞두고 로렐 로지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를 앞두고 로렐 로지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한미동맹, 미일동맹이 체결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늘 불안했던 것은 한일관계의 불연속성으로 인해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나 러시아‧중국의 패권주의 위협에 대해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각각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양국 간 쌓았던 신뢰의 기반은 늘 리셋됐고 선거 때마다 극단주의자들을 등에 업은 포퓰리즘으로 양국관계는 더욱 악화됐으며 여기에 북한과 중국의 갈라치기가 한일관계의 불안정성에 늘 일조해왔다.

이런 악순환의 역사를 깨고 지속가능한 한일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이 결실을 맺게 된 데는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과 추진력이 큰 역할을 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일관되게 한미동맹 강화 → 한일관계 개선 →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의 로드맵 속에서 좌파진영의 선전·선동에 굴하지 않고 그 과정들을 이행해왔다. 그 결과 각국의 정권이 바뀌더라도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지속성 있는 협의체로서의 3국 3각 공조의 틀을 이번 회담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종근 시사평론가
이종근 시사평론가

이번 한미일 서밋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을 억제하고 평화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3번째 모멘텀이다. 이미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주도하에 NATO와 같은 지역안보협력체를 구상하고 적극 추진했었다. 한반도 평화의 첫 번째 모멘텀은 이승만 정부가 추진했던 ‘태평양동맹’이다. 이승만은 1949년과 1953년 2차례에 걸쳐 NATO와 같은 형태의 집단안보 체제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태평양동맹 결성을 앞장서서 추진했다. 그의 집단안보체제 추진은 당시 주한미군 철수라는 대한민국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절박함이 담겨있다.

미국이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을 통합 관리한다는 전략하에 ‘대만 불개입’ ‘한국 방어선 제외’라는 애치슨 라인이 발표되기 전부터 이승만은 이를 예측하고 미국의 결정을 바꾸기 위해 절체절명의 승부수로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의 태평양동맹을 추진한다. 1949년 3월 18일 대만의 장제스 총통, 필리핀의 키리노 대통령과 함께 태평양동맹 결성의 뜻을 표명한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 미국대사를 불러 ①대서양조약 같은 태평양조약 체결 ②한미 간 상호방위협정 ③공산 침략에 대한 한국 방위 서약 공개 선언 중 택일하라고 압박한다.

이승만은 정전협정 직후인 1953년 11월 이번에는 일본 참가를 전제로 한 태평양동맹을 재추진한다. 1차 추진 때와 달리 일본의 참여를 수용한다고 밝힌 것에는 또 다른 숨은 뜻이 있었다. 그는 일본과 동등한 군사원조를 받아냄으로써 한일 간 세력균형을 도모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당시 극동사령관 존 E. 헐에게 일본 포함의 조건으로 한국 해군과 공군의 군사력을 확대할 수 있는 실질적인 군사원조를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태평양동맹은 결성되지 못했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지렛대로 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 조약 체결 과정은 전후 경제 재건과 안전보장을 이루기 위한 외교적 투쟁의 역사였다.

장제스 대만 총통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과 장제스는 1949년 NATO와 같은 다자간 안보협력체인 '태평양동맹' 결성을 추진했다. @대통령기록관
장제스 대만 총통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과 장제스는 1949년 NATO와 같은 다자간 안보협력체인 '태평양동맹' 결성을 추진했다. @대통령기록관

두 번째 모멘텀은 1968년 박정희 정부의 ‘아시아태평양조약기구(APATO)’ 창설 추진이다. 박정희는 APATO 창설을 위해 2년전인 1966년 6월 14일 서울에서 한국, 일본, 대만, 호주,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등이 참가한 ‘아시아태평양각료이사회(ASPAC·Asian and Pacific Council)’를 개최했다. ASPAC 개최와 이를 기반으로 하는 APATO 창설 추진은 이승만의 태평양동맹처럼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위기상황에 대한 타개책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베트남전의 전황에 고무된 나머지 “남조선의 반미구국 투쟁을 지원해 혁명적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할 것”(1967년 10월 최고인민회의)이라고 공언했고 실제로 김신조 등을 위시한 특수부대를 남파하는 도발을 감행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각료 이사회(Asian and Pacific Council·ASPAC) 총회. @대통령기록관
아시아·태평양 지역 각료 이사회(Asian and Pacific Council·ASPAC) 총회. @대통령기록관

박정희는 미국에 북한의 비정규군 도발 시 유엔사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토벌 작전이 가능토록 하고 미국-필리핀 협정처럼 유사사태 발생 시 미국이 자동개입하는 조항을 추가해서 한미방위조약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자국 내 반전(反戰) 분위기를 핑계로 국회 통과가 어렵다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ASPAC에 베트남참전국협의체를 더해 다자간 안보동맹 공동사령부를 추진하면서 대통령은 물론 정일권 총리, 최규하 외무장관, 김성은 국방장관과 김성조 주미대사 등 외교안보라인을 총동원해 미국의 대한(對韓) 특사파견을 성사시키고 일본과 협력체계를 공고히 하는등 다각도의 노력 끝에 ①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미국의 지원 ②한미국방장관회담 정례화 ③한미군사연합훈련 실시 ④한미기획단 창설 등의 성과를 이뤄낸다.

윤석열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 기시다 총리와 함께 만들어낸 지속가능한 한미일 서밋은 이제 미국·호주·영국 3국 간 군사동맹인 오커스(AUKUS), 미국·인도·일본·호주 4개국 집단안보체제인 쿼드(Quad)를 연결하는 새로운 아시아 경제안보체제로 자리 잡아 궁극적으로 NATO 이상의 경제안보체제로 발전할 것이다. 그 안에는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의 앞을 내다보는 혜안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주저함 없이 온 역량을 투여해온 투쟁의 역사가 담겨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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