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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4.3 사건의 진정한 화해는 올바른 성격 규정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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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현의 종횡무진]4.3 사건의 진정한 화해는 올바른 성격 규정에서 출발한다
  • 매일산업뉴스
  • 승인 2023.04.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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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조남현 시사평론가

국민 누구도 억울한 희생자 명예 회복 반대할 사람 없지만
남로당의 계획적인 폭거로 시작됐다는 역사적 정리가 기본
한덕수 국무총리가 3일 오전 제주시 명림로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추념사를 대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덕수 국무총리가 3일 오전 제주시 명림로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추념사를 대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정의당 이정미 대표가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주4·3 제75주년 추념식에서 단상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정의당 이정미 대표가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주4·3 제75주년 추념식에서 단상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매년 그래왔듯 올해 4월 3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잘못된 역사 정리로 인한 갈등과 혼선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제주 4‧3 사건은 정치적으로는 마무리되었지만 역사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주 4‧3과 관련, 다들 입바른 듯 ‘화해’를 강조하지만 과연 진정으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인지, 그냥 당위론으로 하는 소리인지 분명치 않다. 아니 그보다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화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4‧3 추념식에 총출동한 데 반해 윤석열 대통령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등 여권 지도부는 불참한 장면은 분명히 대비를 이루었다. 윤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도 야당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책임과 희생자에 대한 추도를 말한다. 하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그게 뭘까. 이재명 대표는 “정부 여당의 극우적인 행태가 4‧3 정신을 모독하고 있다”고 비판했는데, 그가 말하는 4‧3 정신은 또 뭘까.

거듭 강조하지만 제주 4‧3 사건의 역사적 정리는 잘못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1월 12일 제정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 특별법)’부터 문제였다. 이 법 제2조는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진상조사도 하기 전 사건의 전모를 미리 단정하여 법을 만들었으니 이런 넌센스가 있을까. 진상을 밝히고 난 후에야 어떤 일이 벌어졌고, 누가 어떻게 희생됐는지, 명예회복의 대상자는 누구인지를 가릴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여야 합의로 만든 법이다. 그렇기에 정치적으로 봉합했을 뿐 제대로 된 역사 정리가 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조남현 시사평론가
조남현 시사평론가

그렇다면 여야가 합의로 4‧3 특별법을 만든 배경은 무엇일까. 이것이 오늘 하고자 하는 얘기의 핵심이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승자는 누구일까. 정치적 승자일까. 아니다. 여기서 승자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잡은 세력을 이른다. 문화적 헤게모니란 사회 담론의 주도권을 뜻한다.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 담론의 주도권은 좌파가 장악해 왔다. 현실정치에서야 좌우가 정권을 교체해 왔지만 좌파가 집권할 때는 물론 우파 집권기에도 담론의 주도권은 늘 좌파가 쥐고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4‧3 특별법을 낳은 것은 80년대 이후 제주 4‧3 사건을 ‘민중항쟁’으로 정의하는 수정주의 사관에 의한 담론의 확산이다. 당시 고창훈 제주대 교수가 ‘해방전후사의 인식 4’에 쓴 ‘4‧3 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대표적이다. 이는 ‘남로당의 무장 폭동’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다음은 그의 논지다.

“남로당이 일정한 문제 제기와 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결국은 민중이 삶 속에서 민중 생존과 민족해방의 과제를 수용하고 통일운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였다. …중략… 4‧3 자주항쟁에서의 봉화투쟁과 삐라투쟁, 완벽한 단선거부(남한만의 단독선거 거부: 필자)의 투쟁에도 민중은 주체적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4‧ 항쟁에서 민중과 남로당은 공동주체였는데 남로당은 지도세력이었고 민중은 실질적인 주체세력이었다.”

이 설명은, 다시 말하면 남로당의 선전선동과 조직에 ‘민중’이 동원됐다는 이야기다. 실제 당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남로당의 조직력은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며, ‘민중’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옳은지조차 모른 채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을뿐이다. 민중은 주체세력이 아니라 남로당에 의한 선동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고 교수의 주장대로 민중이 민족해방의 과제를 수용하고 통일운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했다면 고 교수의 의도와는 달리 민중이 억울한 희생자라고 하기 어려울 수 있다. 민족해방과 통일운동이란 ‘미제국주의 및 대한민국 반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절대지지’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파진영에서 제주 4‧3 사건의 성격 규정에 민감한 까닭은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5‧10 총선거를 파탄하기 위해 남로당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게 바로 제주 4‧3 사건이므로, 그것을 민중항쟁으로 규정하는 순간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부인된다는 점 때문에 민중항쟁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4‧3 특별법에 의해 작성된 국가진상보고서는 사건의 성격 규정은 피해갔다. 내용에 있어서는 민중항쟁론을 수용하면서도 민감한 문제인 성격 규정은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봉합했으나 역사 정리는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도 4‧3 사건에서의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보상하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이라면 뒤늦게라도 국가가 사과하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것은 국가의 마땅한 도리다. 그런데 문제는 간단치 않다. 희생자 명단에 올라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우리 아버지를 죽인 자”라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명 살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자들까지 희생자라고 한다면 당시 남로당 무장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유족이 동의할 수 있을까. 시대의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있지만 진정으로 화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겠느냐는 얘기다.

국가보고서에서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일으킨 계획적인 폭거였다고 명쾌하게 성격을 규정하고, 과잉 진압으로 희생된 양민의 명예 회복과 보상을 하되 살인 혐의가 명백한 자는 희생자에서 제외했더라면 소모적인 논란은 없었을 것이다. 화해란 이름으로 봉합해놓긴 했지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할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사건의 성격을 놓고도 논란은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담론의 주도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절감하는 4‧3 사건 75주년이다.

 

*이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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