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현의 종횡무진]자유국가와 아닌 국가를 알게 해준 우크라이나 참상

글 · 조남현 시사평론가 신냉전은 자유의 나라들과 적대국들 간의 대립 구도 칸트의 영구평화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적들을 제어해야

2022-04-14     매일산업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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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지 한 달이 지나며 장기전으로 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쉽게 무너질 것으로 예측됐지만 뜻밖에도 러시아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버티고 있는 것은 물론 서방의 지원 덕분이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공략에 실패한 러시아는 자치령인 돈바스와 루한스크로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 지역을 우크라이나로부터 떼어내 중립지대로 만들면서 전쟁을 마무리하려는 듯하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신냉전 지도가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를 도우며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과 EU 등 서방 및 그 동맹국들이 하나의 진영을 이루고, 중국, 벨라루스, 쿠바, 북한, 베네수엘라 등 러시아를 간접적으로 지원하거나 응원하는 나라들이 또 하나의 진영을 이루고 있다. 물론 제3세계도 여전히 존재한다.

구 냉전이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대립 구도였다면 신냉전은 자유의 나라들과 자유의 적대국들 간의 대립 구도라 할 수 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는 외형으로 보아 민주주의 체제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전체주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다. 거기다가 러시아 국민은 자유로운 개인들이 아니다. 푸틴이 ‘차르’의 위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다.

러시아의 현실을 보면서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새삼 깨닫는다. 칸트가 꿈꾸었던 것과 같이 러시아가 자유롭고, 자율적이며, 평등한 개인들이 인간적 존엄과 시민적 권리를 누리는 사회였다면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략이라는 최악의 결정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실현 불가능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럴 수 있다. 국제관계라는 것이 하나의 잣대로 쉽게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나라마다 추구하는 바와 이해관계가 각기 다르거니와 문화나 사회적 가치 또한 다르니 말이다.

조남현

그렇다고 해도 오늘의 시대에 한 나라의 지도자가 국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쟁을 결심하는 것은 어떠한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정당화하기 어렵다. 어느 나라든 안보는 양보할 수 없는 국익이다. 하지만 안보를 명분으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자유 시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러시아군이 전쟁범죄까지 저지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러시아의 독립조사기관 레바다센터가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푸틴 대통령 지지율이 83%를 기록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푸틴이 러시아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기보다는 러시아 국민이 자유롭고 자율적이며, 인간적 존엄과 시민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건 마치 히틀러가 독일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절대 악’의 지위에 오른 것과 같은 것이다.

푸틴에 대한 러시아인들 지지가 서방의 경제 제재가 아직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보도통제로 인해 국민이 왜곡된 정보만을 접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이러한 사실 자체가 러시아 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인간의 존엄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 말해준다.

만일 세계의 모든 나라가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면 칸트가 꿈꾼 영구평화가 실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공산주의가 붕괴한 이후에도 그 망령이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얼굴로 자유를 위협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중국이 자리잡고 있다.

구냉전 시기 공산 진영의 중심축이 소련이었다면 신냉전의 지금 시기 자유의 적대국의 중심축은 중국이다. 중국은 자유의 적대국들 중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나라다.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가 온존하고 있고, 중국 국민은 자국 우월주의와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공산당에 의해 우매한 대중으로의 전락을 강요받고 있어서다.

이제 세계는 중국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의 나라들이 중국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세계평화는 한낱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자유의 나라로 변신, 또는 진화한다면 세계평화에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당장 대만과의 양안 간의 문제가 전쟁이라는 최악의 수단을 배제한 가운데 평화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현재 중국과 대만 양측은 일촉즉발의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양쪽 모두 자유를 추구한다면 평화적인 통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자면 중국 공산당이 일당독재의 권력을 내려놓고 자유와 공화의 나라로 새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중국은 칼 포퍼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전형적인 ‘닫힌 사회’다. 시장경제를 실시하고 있긴 하지만 개인들에게 정치적인 자유는 주어지지 않고 있고, 모든 것은 당국의 통제하에 있다. 우스운 것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주의’, 곧 역사에 어떤 필연적인 법칙이 있다는 이념적 믿음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다. 남은 것은 전체주의뿐이다.

북한은 더욱 최악이다. 그 어떤 이념도 없이 김 씨 왕가의 건재와 최고 지도자의 신격화만이 목적인 듯 보인다. 개인은 존재할 수 없고, 신격화한 지도자에 맹종할 수밖에 없는 ‘백성’들이 좀비와 같은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암울한 사회가 북한이라는 신정체제의 국가다. ‘위대한’ 지도자는 인민의 삶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자신의 왕조를 지키기 위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자유의 나라와 그 적들의 경계선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영구평화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적들을 자유의 신봉자로 돌려놓거나 자유의 나라가 그 적들을 제어 가능한 상태에 있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다.